오래된 LP 하나를 발견했어요. 먼지를 살짝 닦아내자 빛바랜 재킷 위로 희미한 포르투갈어 제목이 보입니다. 파두(Fado)...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이죠. 천천히 레코드를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어요. 바늘이 홈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자, 쓸쓸하면서도 달콤한 멜로디가 공간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포르투갈어로 '사우다지(Saudade)'라고 부르는 이 감정은 참 이상해요. 그리움인데 슬프지만은 않고, 아픔인데 달콤하기도 하고, 부재인데 오히려 그 존재가 강하게 느껴지는. 마치 지금 이 음악처럼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리스본의 좁은 골목길이, 이 음악 속에서는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네요.
창밖으로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빗방울 하나하나가 창유리에 부딪힐 때마다 마음속에 잠든 추억들이 깨어나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할머니 집 다락방에서 발견한 낡은 사진첩, 대학 시절 잠깐 만났던 교환학생의 미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순간들... 모두가 그립지만, 그 그리움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파두의 선율은 계속해서 흐르고, 저는 창가에 기대어 앉아 이 이름 모를 감정에 몸을 맡깁니다. 그리움이라는 게 참 신기해요. 무언가가 없어서 생기는 감정인데, 오히려 그 부재가 우리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 같아요. 마치 검은 도화지 위에 흰 점들이 빛나는 것처럼, 없음이 오히려 더 선명한 존재가 되는 거죠.
커피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창문에 맺힌 빗방울과 어우러져 흐릿한 그림을 그립니다. 그 모습이 마치 제 마음 같아요. 선명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이 감정.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오래도록 노래해왔나 봅니다. 그들은 알았던 걸까요? 그리움이 때로는 가장 진실된 사랑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음악이 끝나가요. 바늘이 마지막 홈을 지나가면서 들리는 미세한 잡음마저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곧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오늘 이 순간 느낀 'Saudade'는 제 마음 한켠에 작은 보석처럼 남을 것 같아요. 그리움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니까요. 창밖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네요. 오늘은 이대로, 이 달콤쓸쓸한 그리움과 함께 있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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